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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3-19 00:00
[복음]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글쓴이 : 가로등
조회 : 6,604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러한 자리에 앉기 위해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면서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라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먼저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녀의 이름은 마르코 15장 40절에서 보이는 살로메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여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이룩하실 왕국을 어떻게 기대했기에 그런 청을 할 수 있었을까요?
유대 민족은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며 타민족의 위대한 정복자로서의 왕으로 오시며 능력 있는 지도자요 이스라엘의 원수를 넘어뜨리는 왕이며 지상의 모든 열강들 위에 권능으로 군림하시는 통치자로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실 왕으로 기대되었습니다.
바로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대대로 이룩하실 왕국의 한자리를 소망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마디를 들은 다른 제자들이 분개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소청을 꾸짖으시기보다 그녀가 청하는 것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시키시고자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내가 마시게 될 잔을…”이라는 질문을 하신 것인데, 이때에 두 아들들은 “마실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을 합니다.
사실 훗날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다음, 사도들 중에 첫째로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였고, 동생 요한은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요한 1,2,3서, 묵시록을 기록했고 104세에 이르도록 장수하면서 초대교회의 쓰라린 고난의 역사를 몸과 마음으로 모두 당하며 치르신 분이셨습니다.

로마인의 동전을 보면 황소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그 황소는 제단과 쟁기를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마디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일을 준비하고 있으라.”
즉 황소는 제단에 희생 제물이 되는 숭고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논과 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경작을 해야 하듯이, 이처럼 사람도 두 가지 사명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잔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마셔야 할 고난의 잔으로서, 짧고 예리하고 괴로운 순교자의 고난의 삶을 의미하는가 하면 신앙으로 인하여 매일 생활 속에서 희생과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야 하고 실망과 역경의 눈물을 흘리면서 극복해 나가야 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자기 아들들만을 생각해서 예수님께 아들들의 지위와 권위를 요구하는 어머니와 그것에 분개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실망하시거나 그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하느님 뜻으로 이해시키시고자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마음을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베푸셔서 우리가 아무리 철없는 요구를 해도 우리가 실망하고 외면하지 않는 이상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망하시지 않으신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으뜸이라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것, 명령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 손짓만 하면 어떤 일이라도 시킬 수 있고 가장 사소한 욕구까지도 채울 수 있는 것, 그런 것입니까?

세상은 권력을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숭배하고 또 때로는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기준은 ‘봉사’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이것은 삶의 평가 기준을 바꾸어 놓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현실 속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사람보다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피고용자들의 생활의 어려움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고용주 같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속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사람이 같은 일을 하더라도 예를 들어 누가 매에 못 이겨 억지로 장작을 팬다면 그것은 노예 생활일 것입니다.
그리고 품삯을 박고 장작을 팬다면 그것은 건강에 좋은 운동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 일이 아닌데도 노인을 도와 헌신적으로 장작을 패주었다면 그것은 봉사요,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봉사’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어른이 된 사람,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도 같습니다.
가정에서 어린이에게 누가 봉사합니까?
부모가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어린이에 비하여 힘이 없고 부족해서 어린이를 섬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비굴한 자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능력 있고 성숙한 사람으로서 하는 봉사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흔연히 사랑과 겸손한 마음으로 씻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능력 있고 보다 성숙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보다 더 흔연히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라고 하셨고 왕관을 차지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이들의 봉사는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평온하고 묵묵하고 그러면서도 가정과 이웃을 위해 꾸준히 실천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화후광 신부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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