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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7-27 14:59
 조회 : 7,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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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hwp (76.0K) [134] DATE : 2008-07-27 14:59:17 |
기초윤리신학 중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을 조명함
인간(人間)
- 기초윤리신학: F 뵈클레 신부 著(독일 본 대학 윤리신학 교수) ‘중에서 발췌’
그리스도교 인간관(人間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신 하느님의 계시에 의하면, 인간은 그리스도의 동반자(同伴者→協力者, partner)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삶을 영위(營爲)하라는 소명(召命)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인간을 대할 때에 '그리스도'에 비추어 인간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며, 그가 자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데는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인간관은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貌像)이요, 구세사(救世史)에서의 하느님의 협력자(協力者→同伴者)로 본다.
제 1 절
인간: 하느님의 모상(貌像)
가톨릭 神學은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두 가지 모상을 보고 있는데, '창조'(創造)의 관점에서 보는 피조적(被造的), 자연적 모상(自然的 貌像)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관점에서 오는 초자연적 모상, 은총 입은 모상이다.
Ⅰ 하느님의 자연적 모상
인간이 본성상(本性上, de natura) 하느님의 모상이라 함은 특히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바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들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창세기 1,26 이하)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께 창조받은 본성(本性) 및 다른 피조물에 대한 우위성(優位性)으로 인해서 자기 창조주를 닮은 모상이 된다.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과의 특수한 관계에서 고찰해야만 그 정체가 밝혀진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연적 모상됨은 다음과 같은 원리에 비추어 설명해야 할 것이다.
1. 인간의 영성(靈性)
인간은 자기의 영(靈: spiritus) 때문에 순수영(純粹靈)이신 하느님을 닮았고, 이성(理性)이 있는 까닭에 사유(思惟)를 못하는 모든 피조계(被造界)를 초월한다. 창세기(1,26)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유사성(類似性)을 이야기할 때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과 특히 관련시킨다.
피조계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 최고 통치자의 모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인간은 지상(至上)의 통치권을 가지신 창조주 하느님을 지상(地上)에서 대리(代理) 한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이 하느님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단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인간이 행하는 이성적이고 책임성있는 '행위'(行爲)와도 관련됨을 암시한다. 인간의 이성적 본성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련하에서 생각하고 의욕하고 행동하는 기반(基盤) 일 따름이다.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창조계에 가장 훌륭하게 반영하는 일은 오직 인간적 행위를 통해서다.
理性이 인간본성의 불가분한 일부이듯이, 인간의 하느님과의 자연적 유사성(類似性)도 상실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며 인간의 자연본성의 일부가 된다,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본성도 하느님의 모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께로 정위(定位) 되어 있다. 이 점은 윤리신학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른바 '본성상 선한행동'(actus naturaliter bonus)과 '본질상 악한행위'(actus per se malus)의 이론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연적 모상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본성의 본질적 법칙에 상합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 인간의 육체성(肉體性)
영혼은 인간 전체에 삼투(滲透)하고 있으며 인간의 전체성(全體性)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육체를 영혼으로 형상화(形相化)된 질료(質料: materia spiritu informata)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하느님과의 유사성 안에는 육체도 포함된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대상은 영(靈)과 육(肉)이 합쳐진 단일한 인격(人格)이다. 그리고 인간은 영육(靈肉)의 복합체(複合體)로서 하느님 앞에 책임있는 행위자(行爲者)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화(肉化)와 육신 부활의 교리를 말하지 않드라도, 이런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육체면(肉體面)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잘못임을 깨닫고 남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1) 육욕(肉慾)이 모든 악의 유일한 근원(根源)이거나 통로(通路)는 아니다. 그것이 악의 커다란 요인이 됨은 사실이지만 오만(傲慢)은 인간 정신에 더 해로운 작용을 한다. 이 육욕과 오만은 전체 인간에게 작용하며 따라서 그것들을 극복하는 길은 전체 인간의 힘을 동원하는 일이다.
2) 윤리선(倫理善)은 전체 인간(全人)에 의하여 유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온전히 인간적인 선(善)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영.육'의 활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활력들을 '욕정'(欲情, passiones)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그 단어에 어떤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영성적 의지(靈性的 意志)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감관(感官)의 욕구에 의해서도 선한 것을 추구 한다"고한 것은 감관의 욕구도 인간의 윤리적 완성에 기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3. 인간의 역사성(歷史性)
역사성이라 할 때, 우선 "존재와 생성"(生成) 사이의 인간적 긴장(緊張), (A.Delp) 또는 생성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피조물은 그저 '존재'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된다. 그처럼 인간도 고정된 이성적인 본성에 의해서 그저 하느님의 모상'임'에 그치지 않고, 자기 행위로써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성격'(imagocharacter)을 더욱 '형성'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역사성의 둘째 의미가 나온다. 개인은 많은 존재와 행위들이 얽힌 전체 속에 놓여 있으며, 거기서 자기발전에 막심한 영향을 받는다. 인간 생성은 단지 타고난 잠재능력을 개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역사적 시간과 역사적 공간 속으로 분출(噴出)하는 것이다. 역사적 시간이라 함은 결단(決斷)의 순간이며, 바로 지금 현재 내리는 결단의 순간이다. (성서는 이 시간을 kairos라 일컬으며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때'를 가리킨다). 하느님이 구체적인 부르심이 인간에게 전달되고 또한 항상 새로이 전달되는 것도 이 카이로스에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과 선조들의 과거 유산(遺産)과 주위 환경에서 오는 영향력, 한마디로 자기의 역사적 상황(歷史的 狀況) 전체를 받아들이고 계발(啓發)하여 자기의 미래를 구축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개개 인간은 이렇게 함으로써 - 사실상 하느님의 구세사(救世史)인 - 세계사(世界史) 속에서 하느님의 모상의 성격을 공동으로 형성(形成)하지 않으면 인된다. 역사의 시원(始原)과 종말(終末)에는 운명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며, 따라서 역사의 부름은 곧 인간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소명(召命)이요, 인간의 실존은 맹목적으로 내던져진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고 하느님을 위해 있는 (향하는) 실존인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께 창조된 모상의 본질적인 양상을 그려보면서 인간의 자연적 본질을 배경으로 인간을 묘사하고자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경륜(經綸)에 의하면 인간은 은총으로 초자연적 상태로 높여지고 성자(聖子)의 모습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불리었다. 하느님이 정하신 현실적 구원질서 안에는 완전하고 분명한 하느님의 자연적 모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의 인간은 당초 하느님의 초자연적 모상으로서 창조되었고 천국에서 영원히 하느님을 직관(直觀)하라는 초자연적 목표에로 정향(定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향방(向方, orientatio)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의 자연적 모상됨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모상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초자연적 모상만이 인간의 진면목(眞面目)이라면 무엇 때문에 자연적 모상을 운운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초자연적 모상이 자연적 모상을 말소(抹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전제로 하고 있고 또 그것을 완성하기 때문에 이를 거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윤리적 책임의 근거를 발견하는 곳도 자연적 모상의 제요소(諸要素)에서다. 인격(人格) 역시 자연적 모상에 해당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윤리(倫理)의 기초가 된다.
인격
1) 자율성(自律性, autonomia: 자립성(自立性, subsistentia) 또는 인간의 내면적이고 본원적인 비종속성(非從屬性, independentia)을 일컫는 말이다. 내자존재(內自存在, Insichsein)와 대자존재(對自存在, Fürsichsein) - 내적 자족성(自足性) - 라는 개념은 철학상의 인격 개념에 있어서 첫째가는 요소이다. 그것은 단순히 개별성(個別性, individualitas) 이상의 무엇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개별성이라는 것은 동식물처럼 '밑에서'(from below), 즉 물질과 생명의 차원(次元)에서 비롯하지만 않고, 직접 '위에서(from above), 즉 인간의 정신성(精神性)에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어느 개인에게만 있는 본질적인 고유성(固有性)은, 속성(屬性)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개차(個差)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인간이 유일무이하고 고유한 창조행위(創造行爲)를 거쳐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각 개인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치(代置)할 수 없는 일회적(一回的)인 방식에 의해서 존재의 세계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윤리 도덕은 인간을 보편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 인간의 유일성(唯一性), 그 인간의 개별적 가치에서 봐야 한다. 이 개별적 가치라는 것은 그 인간이 하느님께 받은 유일무이한 창조와 소명에 근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개별적 가치를 일반적 특성에다 환원시켜 버릴 수 없다.
2) 자기성취(自己成就, sui-perfectio): 현대철학에서 존재를 이야기할 때 쓰는 '실존'(實存)을 가리킨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롭고 인간다운 행위를 통해서 자아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격이다. 인격은 개별행위들의 발원점(發源點)이나 귀착점(歸着點)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인격은 자기의 행위에서 자기의 고유한 개별성(個別性)을 표출(表出)하며, 그 행위를 갖고 자기의 형상을 결정(結晶)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행위에 관한 최종의 판단을 내릴 때 그 행위를 영위하는 인격체에서 유리시켜 판단해서는 안된다.
3) 책임성(責任性, responsabilitas): 인간의 자율성(自律性), 인간의 역사적 특성, 자유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지속적인 자기전개(自己展開) 등을 볼 때에, 인격체가 내적인 자족성(自足性)을 갖는다고 해서 외부 환경과의 고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가 아닌 사물과 관계를 갖고 있다. 우연유(偶然有)로서의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여 자기의 기원(起源)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 기원에 비추어보지 않고서는 인간은 개별적 영(spiritus individuus)으로서의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는 법이다. 하느님은 유일무이한 인격을 지닌 인간들을 하나씩 이름 부르시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의지행위(意志行爲)의 대상물만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살아있는 '너'(Tu)로서 상대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피동적이고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분한테 응답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존재다.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부름을 받고 있고 더욱 구원하시는 용서의 말씀에 의해서 부름을 받고 있다. 인간은 이 말씀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며 자기편에서 대응하는 언어, 즉 응답(應答)을 할 수 있다. 응답하는 능력이 있기에 인간의 책임성이 비롯하고, 여기에 모든 윤리의 토대가 있는 것이다.
Ⅱ 하느님의 초자연적 모상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에게 끌어올리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이래로, '인간적인 것'(humanum)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수렴(收斂)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정향(定向)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육화(肉化)한 말씀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인간' 그대로다.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자연적 모상과 초자연적 모상이 궁극적인 종합을 이루었고, 인간이 하느님 앞에 도달해야 하는 경지가 어떤 것인가를 읽게 된다. 영원하시고 자애하신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우리들을 부르시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로마 8,29; 에폐 1,6) 하셨다". 우리 모두의 얼굴은 가리워지지 않는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주며,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주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으로 더욱더 영광스럽게 된다'(2코린 3,18).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만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지음받은 새 인간이 된다(콜롯 3,10; 에폐 4,24). 은총을 입어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모상인 것이다. 은총을 입은 모상이란 어떤 것인가를 신약성서와 신학적 고찰을 통해 살펴보겠다.
1. 신약성서
1) 우리가 지닌 하느님의 모상은 하나의 '새로운 창조'이다. 죄악으로부터 재생되어 나와서 의화(義化)와 성성(聖性)의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인간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롭게 된 것입니다"(2코리 5,17; 갈라 6,15). 바오로가 '새로운 창조'라 한 것을 요한은 새로운 탄생(誕生), 재생(再生)(요한 3,3.8) 또는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남(1요한 2,29; 3,9)이라고 표현한다.
2) 그리스도가 하느님을 닮은 점과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점은 어느 면에서 같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들이다. 다만 그리스도는 본성(本性, natura)에서 아들이 되고우리는 의자결연(義子結緣, adoptio)으로 아들이 되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가 아들로서 상속인(相續人)이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의 아들들인 이상 하느님의 상속인들이며 우리 장형(長兄)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들어올림을 받아 영광을 누리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로마 8,14-17; 갈라 4,4-7). 그래서 바오로는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 이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었다.
3) 인간이 하느님의 자연적 모상이 되는 점이 인간의 '정신적 본성(natura spiritualis)에 기반을 두고 있듯이, 하느님의 초자연적 모상이 되는 점은 성령(聖靈), 그리스도의 영(靈)을 모시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성령이 우리한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며(로마 5,5; 1코린 2,12; 3,16; 6,19; 2코린 3,3; 5,5; 갈라 3,2; 4,6) 성전에 거하시듯이 우리 안에 사신다(1코린 3,16이하). 우리는 성령에 취(醉)하고 성령으로 도유(塗油)되고 성령으로 날인(捺印)된 것이다(1코린 12,13; 2코린 1,21이하;에폐 1,13;4,14이하).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도 그리스도의 성령 덕분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속에 계시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
4) 이처럼 쇄신된 인간 속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은 하느님을 알아 뵙고 사랑하는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지식과 사랑은 천상에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콜롯 1,9; 필립 1,9 이하).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알고 사랑하시듯이(1코린 13,12;갈라 4,9) 우리도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그러한 지식과 사랑을 뜻한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한다 함은 하느님 당신의 지식과 사랑 속에 받아들여지고 그분의 지식과 사랑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는 사랑에서 얻어지는 신앙을 힘입어 불완전하게 이루어지나 훗날에는 지복직관(至福直觀) 속에서 그 지식과 사랑을 완전무결하게 나눠 받는다"(G. söhngen) 이러한 지식과 사랑에 의하여 인간은 하느님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3,1-2; 4,7-8) - 께 동화(同化) 된다.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2베드 1,3-4) 되는 것이다.
5) 새 인간 속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은 곧 그리스도를 닮은 모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전인(全人, totus homo)이, 따라서 육과 영이 포함된다. 물론 죽은 이들의 부활이 오기까지는 이 사실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다. 그날이 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필립 3,20 이하; 1코린 15,47-48). 따라서 육체의 면에서 볼 때에도 은총을 입은 모상은 자연적 모상을 완성시킨 것이요 들어 높인 것이라 하겠다.
2. 신학적 고찰
하느님의 총애를 입은 인간, 그리스도와 일치된 인간이 곧 하느님의 모상이자 그분과 유사한 존재인 것이다. 은총을 내리신다는 것은 하느님이 당신을 열어보이시고 당신을 내주시는 것이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간이 당신의 신적 생명(神的 生命)을 더불어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요 성부의 성령이 인간을 차지하시고, 그 성령을 통해서 성부와 예수께서 그를 차지하신다. 성삼위 하느님이 그 놀라운 방식으로 자기한테 머무르시게 하려면 인간은 그럴 태세가 갖춰져야 한다. 사실은 하느님이 내림(來臨)하심으로써 그 준비를 갖춰주시는 법인데 이렇게 되면 그 인간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은총의 하느님이 인간 안에다 무슨 일을 일으켜 놓으시면 내면에서부터 그 인간을 뒤바꿔 놓으신다. 그 인간을 따로 가려내시어 그의 '마음'을 비추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며, 신앙과 사랑으로 당신을 받들어 섬기는 새로운 능력들을 그의 정신 기능에다 주입하신다. 수세기를 두고 신학은 인간 안에 일어나는 은총의 작용을 분석하고 규명해 보려고 힘써왔다. 은총을 힘입어 완성되는 하느님의 모상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보려고 애썼왔다. 과연 인간이 지닌 자연적 모상이 불완전하게밖에 하느님을 반영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면, 이러한 노력은 매우 정당한 노력이라 하겠다. 신학에서는 인간이 지닌 초자연적 모상의 주요 특징으로 성화은총(聖化恩寵)과 천부덕(天賦德)을 꼽는다.
1) 성화은총(聖化恩寵)
성서에서 말하는 은총의 선물(charisma, dooron etc,)에 해당한다. 그것은 의화(義化)된 죄인한테 선물로 주어지는 성성(聖性)과 의인(義認)이며(로마 5,17; 8,10; 9,30; 10,6), 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새로이 창조되어(2코린 5,17; 갈라 6,15) 하느님의 본성(本性)에 참여한다(2베드 1,3-4).
신학상으로는 하느님께 있는 고유한 은총(gratia increate: 本然의 恩寵)과 이 자비로운 은혜가 인간 안에서 일으키는 효과(具現의 恩寵)를 조심해서 구분하기는 한다. 새로난 인간, 새로워진 인간은 하느님의 총애를 입어 사는 인간이다. '은총의 상태에 있다' 함은 '하느님의 총애를 입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은총이라는 것이 하나의 총애요, 好意라고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 은총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그것은 자비로우신 한분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 한분 안에서 당신의 충만한 호의, 모든 은총을 우리한테 쏟으신다. 주님은 하느님의 은총이시다. 우리에게 쏟으시는 하느님의 총애이시며, 인격화된 호의이시다(디도 2,11).
그밖에, 우리에게 오는 은총의 선물은 무엇이건간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받는 것이다(요한 1,16). 바오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총은 오로지 "의덕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서 반사(反射)되어 나온다.
인간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변화가 생기고, 당신의 존재와 지식을 둘 다 상통해 주시고 참여시키실 때에, 또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시가 하나의 사실(事實)이 된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만일 그리스도와 사실상으로 결합됨으로써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일이 안생긴다면 하느님의 계시라는 사건도 인간과 하등 상관이 없다. 그럴 때에 하느님과 인간이 갖는 협동성이 문제가 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266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께서는 세례 받은 사람에게 성화하는 은총, 곧 의화(義化)하는 은총을 주 신다. 이 성화 은총은,
- 향주덕(向主德: 信,望,愛)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며,
-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고 행동할 수 있게 하며,
- 윤리덕(倫理德)을 통하여 선(善)이 성장하도록 해 준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인 삶 전체가 세례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9 그리스도의 은총은 무상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죄에서 치유하여 거룩하게 하시려 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영혼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당신의 생명이다. 이 은총은 세례로써 받는 성화 은총(聖化恩寵, gratia santificans) 또는 신화 은총(神化恩寵, gratia deificans)이다. 이 은
총은 우리 안에서 성화 활동의 샘이 된다.
"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
습니다(2고린 5,17-18).
2000 성화 은총은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그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상존은총(常存恩寵)이며, 지속적이고 초자연적인 성향이다. 이 성화 은총,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고 행동하고자 하는 변함없는 마음가짐인 상존 은총은, 회개의 시작이나 성화 활동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키는 조력은총(助力恩寵)과는 구별된다.
2) 천부덕(天賦德)
천부덕(virtutes infusae)은 성화은총과 직결되어 있다. 사실상 구현은총의 한 형태라고 하겠다.
가톨릭 신학은 은총 때문에 인간 안에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남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이
'신화'(神化)한다는 말은 아니다.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초자연적 실존과 생명은 '행동'을 지향하고 있다. 활동함으로써 그 실존을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 있지만,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행위 가운데서 하느님의 모상이 구현된다. 우리가 은총이라고 부르는 신감(神感)은 인간의 능력과 역량에도 힘을 미친다. 이 신감은 이성과 의지와 기질(氣質)이 제각기 분업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접속시키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덕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덕은 인간의 실존적 고양(實存的 高揚)이다. 덕은 토마스 말대로 ultimum potentiae, 즉 인간에게 도달 가능한 능력의 극점(極點)이요, 자연계에서나 초자연계에서 인간에게 있는 존재론적 가능성들이 완전개화(完全開花)한 상태이다. 유덕한 인간이란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성향(性向)에서 우러난 행동으로 선(善)을 성취하는 사람이다. 덕이란 어떤 개별 행동을 하고 하지 않고가 선하거나 올바르다는 뜻이 아니다. 덕은 자연의 차원에서나 초자연의 차원에서나 인간이 '바르게 존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자연계의 차원에서는 덕은 행습(行習)으로 얻어지는 하나의 숙달(熟達)이며 해당된 행위를 기꺼이 또 쉽게 하게 만든다. 덕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타고난 능력을 전제로 하며, 그 행동을 쉽사리 또 기꺼이 행하는데 도움이 될 따름이다. 오랫동안의 행습에 의해서 용감한 인간 또는 절제하는인간이 되면 용기를 내거나 절제의 행위를 하기가 쉽고 재빠르다.
그런데 초자연 영역에서는 덕이라 하면, 인간의 능력과 상황을 초월하여, 그 인간이 타고난 자질(資質)을 고양(高揚)시키는 것이다. 거기서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바라고 초자연한 행위를 할 적성(適性)과 자질(資質)을 얻는다. 이로 말미암아 본래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 노력으로는 그 덕을 습득하지 못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다. 이것 역시 '구현은총'(具現恩寵)과 성성(聖性) 이라는 테두리에 들어간다.
하느님이 특별히 내려주시는 것이기에 천부덕(天賦德)이라고 한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닌 만큼 친숙하게 기꺼이 행동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용이성(容易性)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한 행동이 나올 수 있는 원칙적 가능성을 조성해 준다.
신학 용어를 빌리면 faciliter posse(쉽게할 수 있다)가 아니고 simpliciter posse(할 수 있게 되었다)가 된다. 이 원천적 가능성 또는 초자연적 적성은 인간의 이니어시티브나 자질과는 일체 무관하며, 세례 때에 부여 받는다. 처음 받을 당시는 씨앗 속에 잠재하고 있는 생명력과도 같다. 그리고 이 선물이 은총과 더불어 인간에게 처음 부여되듯이 그것이 지속(持續)하는데도 은총에 의존한다. 그러니까 사죄(死罪/大罪)를 범하여 은총을 상실한다는 것은 곧 천부덕이 상실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초자연적 적성(適性)들이 발전하는 데도 인간은 은총의 도움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도 자기 윤리행위를 함으로써 이 발전과정에 무엇인가 기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럴 경우에는 수득덕(修得德)이 천부덕의 작용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겠다. 초자연적 덕(超性德)이 완전한 실현을 보려면 자연적 덕(自然德)이 없어서는 안된다.
초성덕은 대신덕(對神德)과 윤리덕(倫理德)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대신덕은 인간이 하느님과 직접적인 상관(相關)을 이루게 만든다. 대신덕은 직접 하느님을 목적으로 삼으며, 인간이 가진 능력을 다해 하느님을 알아 뵙고 사랑하고 열망하게 만들되 어디까지나 하느님께 맞갖은 방식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한다. 여기서 '하느님께 맞갖은 방식'이란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 뵙고 그분을 사랑하되,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그대로가 우리에게 연장되고 반영된 결과가 되도록 한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만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대신덕(對神德 )이 된다. 이 세 가지 덕을 힘입어 행동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성삼위 생명(聖三位生命, vita trinitaria) 속으로 흡입되는 것이다.
윤리적 천부덕이 하느님과 직접 상면(相面)할 자격을 인간에게 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도 윤리적 천부덕은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일정한 윤리가치(정의, 진실, 節度와 용기 등)들을 실현시키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윤리덕은 인간으로 하여금 복잡다단한 일상생활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입각하여 살아갈 힘을 준다. 다시 말해서, 은총 안에 새로이 창조된 인간 처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동해 나갈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구속(救贖)받은 인간은 자기 구속주(救贖主)의 살이 있는 모상이요, 그래서 또한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 모상은 매일의 생활을 영위해 가는 인간이요, "하느님께 기묘히 지음 받았고 더욱 기묘하게 새로 지음받은" 인간이며, 하느님은 이 인간과 더불어 지상에서 전개되는 역사에 들어오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은 하느님 대전에 자리를 잡아야 하며, 자기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분을 모시고서 자기 구원의 역사를 전개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물론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어 가면서 말이다).
제 2 절
인간: 하느님의 협동자
인간이 하느님의 협동자(協同者, partner)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당연히 하느님의 협동자가 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하느님과 마주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격신(人格神) 하느님께 하나의 인격으로서 부름을 받고 생활과 행동을 함께 하자는 초대를 받는다. 인간의 윤리적 의무와 크리스찬으로서의 자유는 바로 이 공동유대(共同紐帶→協同關係, partnership)에다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Ⅰ. 윤리적 의무
1. 상 황
그리스도께 구속(救贖)받은 인간은 '두 개의 세대 사이에' 자리잡은 구세사 속에 살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구속을 가져온 당신 죽음으로써 "이 악한 세대"(갈라 1,4)에서 우리를 원칙적으로 구출해 내어 우리가 다시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에폐 2,2)살지 않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 세상"은 비록 그 형태가 "사라져가고 있기는"(1코린 7,31) 하지만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이전 세상은 근본적으로 패멸(敗滅)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현존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에 사는 크리스찬이 아직도 이전의 묵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다. "이세상을 본받지 말라"(로마 12,2)는 경고가 지금도 유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상 구원을 받았고 주님 안에 새로 창조되었으나(2코린 5,17) 아직 "성숙한 인간,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지"(에폐 4,13)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발(始發)한 구원과 종국(終局)의 구원 사이에서 끊임없는 긴장을 갖고 살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인간에게 윤리가 요청된다.
2. 과 제
우리 인간은 어느 면으로는 구원을 이미 확보하였고 다른 면으로는 아직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 양자 사이에서 일종의 긴장이 생기며 여기서 우리의 윤리적 정립(正立, authenticitas)이 문제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정립해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확보한 바를 단단히 보증하고 아울러 앞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물려받을 상속(相續)에다 희망을 걸 수 있게 된다. 성 바오로의 윤리의 근본이념이 바로 이것이다.
바오로는 이 이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죄악에 사로잡힌 노예신분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로 전향(轉向)한다(로마 6,12-14, 16-23):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에 하느님께 화해된 몸이기는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과 화해할 본분도 있다(2코린 5,19): 하느님의 영(靈)이 우리 안에 살으시면서 우리를 충동하시지만 우리 편에서도 성령의 충동을 받게끔 허심(許心)하고 있어야 한다(로마 8,11):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살고 있는 몸이지만 스스로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거닐어야 한다(갈라 5,25): 성세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죄에 죽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바 되었으므로 우리는 자기 내부에 있는 "지상적인 것을 죽여야" 한다(콜로 3,3-5; 로마 6,1-12 참조). 바오로의 서간들은 읽으면 이상과 같은 직설법(直說法)과 명령법 문장이 무수히 나온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은 자다운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폐 4,1)
크리스찬 각자는 자기의 윤리생활(倫理生活)로써 크리스찬으로서의 실존을 결실(結實)케 해야 하는, 일회적(一回的)이고 취소할 수 없는 사명을 안고 있다.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기 힘으로 더욱 발전 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자연 윤리(超自然倫理)의 목표와 내용은, 그 인간이 그리스도한테 합일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소이(所以)를 가장 완전하게 구현하는 데, 보다 더 그리스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생생한 모상, "제이(第二)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는데 있다.
3. 실 현
'제이(第二)의 그리스도'가 되라는 사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협동자(파트너)로서의 인간은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조심할 일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을 윤리행위라는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릇 알아듣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사(聖事)를 힘입은 재생(再生)에서 이 사명이 우리에게 부여된 이상, 이 사명을 완수하는 일도 성사생활(聖事生活)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방(模倣)이란 실은 성사(聖事)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동영위(共同營爲, concultivatio) 한다는 뜻이 된다.
성세성사(聖洗聖事)는 인간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同參)시킨다. 성체성사(聖體聖事)는 희생으로서의 주님의 죽으심을 재현(再現, recelebratio)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신에 동화하여 자기희생의 태세가 갖춰질 때에 우리는 이 신비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성사라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교 생활을 향해서 정립(定立)이 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근본법칙을 어떻게 구현하는가를 대강 알 수 있다. 그 법칙은 죽음에서 생명이 흘러나온다는 법칙이며,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은 연후에야 비로소 열매를 거둔다는 법칙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신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게 하는 것도 성사이다. 크리스찬은 윤리생활이라는 면에서도 인격 대 인격으로 그리스도와 마주서게 된다. 성사생활이 순전히 인간적인 노력을 그보다 높은 차원에로 올려놓기는 하지만, 인간이 여전히 하느님의 협동자로서 윤리행동을 해야하는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다. 크리스찬이 하는 행동은 인간 능력에만 전적으로 유래하는 것은 아니요, 오히려 항상 천상의 은총에 죄우되므로(따라서 그것을 우리가 자랑할 것은 못된다: 로마 3,27) 크리스찬의 생활에는 반드시 神的 이니시어티브와 인간적 이니시어티브가 상호 교차한다.
신약은 이 문제에 대해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상징을 빌어 이야기 한다. 나무줄기(그리스도) 속에 흐르는 활력(성령)이 가지들(신도들)에 열매를 준다. 이 과정은 기계적이 아닌 유기적(有機的)인 과정이며, 가지는 본성에 따라서 기거에 능동적인 참여를 하게 된다.
하느님께 의화(義化)된 사람은 자기 생활을 성화(聖化)하는 일에 협조할 본분이 생긴다. 최후 심판에서 인간은 자기의 '행업'(行業),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이룩한 그 행업에 준해서 판결을 받을 것이다. "그날에는 우리가 육체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코린 5,10; 로마 14,10)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그분과의 성사적 유대(聖事的紐帶, communitas sacramentalis)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역사상의 그리스도이다. 우리 위해 살고 우리 위해 고난받은 사람이며 우리를 사랑하였고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는 본보기를 남긴 분이다. 그래서 은총으로 그 분과 이루어지는 일치는 곧 사고방식과 의향(意向)까지 주님과 함께하도록 노력하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 윤리도덕의 차원에서 주님께 드리는 애정어린 순종이 되고 주님게 순종하는 사랑이 되어, 그분의 뜻을 다하는 일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자유(自由)의 신비가 또한 깃들여 있다.
Ⅱ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libertas christiana) 라고 할 때에 자유의지(自由意志, liberum arbitrium)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필수 조건이 된다. 자유의지가 인간의 정신적 본질에 속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철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간 영혼의 영신성(靈神性)과 관련 시켜 논한다.
1) 소극적 의미에서 자유의지는 미정(未定, indeterminatio), 즉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강박(强迫)을 받고 있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2) 적극적 의미에서는 인간이 자기 행동을 자결(自決/自己決定, suideterminatio) 함을 뜻한다. 인간은 책임을 지고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 행동을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은 행위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靜動의 自由),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다(類別의 自由).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사할 때에 하느님을 닮은 유사성이 가장 뚜렷이 표현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조물이기에 이성이 없는 피조계(被造界)에 대해, 하느님의 주재권(主宰權)을 한몫 나누어 받으며(창조적인 자기결정(自己決定)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자기표현을 모방(模倣)한다. 인간에게 다양한 영향력, 즉 유전적(遺傳的) 성향(性向)이나 인간의 환경에서 유래하는 영향력이 미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윤리적 책임을 말살할 만큼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지 못한다.
신양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다음 두 가지로 나뉜다.
1. '.... 로부터'의 자유
1) 죄(罪, hamartia)로부터의 자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
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6,18-23). hamartia, 죄, 아담의 행실로 세상에 들어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 그것이 구속(救贖)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로마 5-7장에 이르는 대목을 보면 hamartia(여기서는 '原罪'를 뜻한다)의 위험성을 갖가지 형상으로 서술되어 있다. 순전히 혼자 버려둔 인간은 '죄에 팔린'(7,14) 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구속받지 못한 인간을 가리켜 서슴치 않고 '죄의 종'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의화(義化)에 의해서만이 인간은 이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된다. 죄는 근본적으로 패멸(敗滅)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육(肉) 안에' 있는 한, 여전히 이 종살이 자취를 느낀다. 그렇지만 '영(靈, pneuma) - 성령의 능력 -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수단을 얻게 된다.
2) 율법(律法,nomos)으로부터의 자유
크리스찬은 법없이 살지는 않으나 이미 '율법의 지배하에'(로마 6,15) 있지는 않다. 옛 모세의 율법이나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되는 어떤 법률의 지배하에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보다도 크리스찬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하에' 살고 있다. 당신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히 채웠고 우리를 위해 신령한 영(靈, divinum pneuma)의 근원이 되었다. 이 영(靈), 선물로 주신 성령(聖靈)이 곧 새로운 법, 그리스도의 법이시다(갈라 6,2).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사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행할 힘을 주신다(로마 8,3). 이 법은 '외부에서' 우리한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작용하여 은총의 호소(呼訴)이자 하나의 요청으로 들려온다. 크리스찬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달성 못할 수많은 요청을 외부에서 받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것을 행하라고 충동하고 그럴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소리를 내심에서 듣는 것이다. 성령께 자기자신을 열어놓고 있는 인간은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다.
3) 죽음(thanatos)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은 '죄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결과에 불과하다. 죄에 종살이 하는 '대가'(代價)로 죽음[물리침 당함]을 얻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성성(聖性)에다 영원한 생명을 덧붙여 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크리스찬의 희망이야말로 육체의 죽음을 그 크나큰 공포에서 풀려나게 만든다.
2. '...을 위한 자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과 죽음) 세가지 공포에서 풀려난(갈라 5,1) 덕분에 우리는 '사랑을 갖고서 하느님의 편에 서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크리스찬은 하느님 편에 서느냐 등지느냐는 결단을 이미 내린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크리스찬은 이미 자유로운 몸이 아니다: 죄에 대한 종살이를 거부하고 하느님을 자기 주님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편들기로 한 이 선택에 크리스찬의 자유가 있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귀의(歸依)하는 데에 그 자유가 존립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하는 완전한 사랑. 성령의 인도에 장애가 될 만한 것은 다 벗어나 자기를 온전히 지배하며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을 섬기게 된 완전한 사랑, 바로 여기에 자유의 절정이 있다. 하느님의 영(靈)이 이끄시는 대로 온전히 내맡기고 있는 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다.
"주님은 영이시오, 주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 자유가 있기"(2코린 3,17) 때문이다. 이와같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볼 때에 비로소 성 아우구스띠노의 저 유명한 금언(金言)을 올바로 이해하리라 본다.
"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 인간은 자아실현(自我實現)을 요구하는 근본요청을 심성(心性)에서 느끼고 있다. 자기가 하느님과 유사한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자아를 실현할 의무와 그럴 성향이 있음을 터득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선을 향하는 자연적 성향이 있고 사물을 인식하는 생래적 지력(知力)이 있는 만큼,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 법칙에 입각하여 자기 행동을 이끌어가야 한다. 우리는 양심의 명령을 통해서 이 과업을 부여받고 또 성취하게 된다.<자연 도덕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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