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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7 21:33
[나눔얘기] 11월 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글쓴이 : 하늘빛
조회 : 7,223  

St Clare and St Elizabeth of Hungary - SIMONE MARTINI
1317.Fresco, 215 x 185 cm.Cappella di San Martino,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축일: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Saint Elizabeth of Hungary (Franciscan)

Sant’ Elisabetta d’Ungheria Religiosa

1207 at Presburg, Hungary -

1231 at Marburg;her relics,including her skull wearing a gold crown she had worn in life,

are preserved at the convent of Saint Elizabeth in Vienna, Austria

Canonized :27 May 1235 by Pope Gregory IX at Perugia, Italy

재속 프란치스코회 수호 성녀

 

1207년에 태어났다.

헝가리의 왕 안드레아의 딸로서 어린 나이에 튜린지아의 루도비꼬 4 세와 결혼하여 세 아이를 낳았다.

자기 직무에 충실을 기한 동시에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는데 헌신하고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나병환자들을 손수 간호해 주었다.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서 죽자 자녀들과 함께 부당하게 궁정에서 쫓겨났다.

이 새로운 빈궁의 처지를 신앙과 인내심으로 받아들이고

자녀들의 육아 및 환자들의 간호와 기도생활에 계속 몸바쳤다.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의 회원이 되었고 1231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3 회의 주보성녀이다. 그레고리오 9 세가 시성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St Elisabeth, St Margaret(St clara) and Henry of Hungary-SIMONE MARTINI

1318, Fresco, 120 x 228 cm.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헝가리의 열심한 왕 안드레아 2세는 1207년 귀여운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 아이는 매우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투린지아(Thuringia), 헷세(Hesse) 지방의 부유한 백작이

자기의 큰아들 루이의 신부감으로 일찍부터 점찍어 놓았습니다.

이 일이 성사되자 엘리사벳에게 정식으로 사절을 보냈는데 그때 그녀 나이 겨우 세 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다음에 남편이 될 루이의 집(성)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두 아이들은 친남매처럼 사랑하였고 하느님께 대한 신심과 이웃에 대한 자선행위를 서로 다투어 실행했습니다.

기도하는 엘리사벳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천사를 보고 있다고 믿을 정도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일이 그녀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좀 성장하자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방문했고,

마치 주님께 봉사하듯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을 보살폈습니다.

 

야심 많은 백작 부인 소피아 미망인은 엘리사벳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을 헝가리로 되돌려보내고 더 위엄 있는 아가씨를 신부감으로 만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루이는 엘리사벳이 얼마나 보배로운 존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18세에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게 된 그는 엘리사벳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생활은 정말 행복했고 루이는 자기 부인이 하고자 하는 모든 선행을 하도록 완전히 자유를 주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인세낙에 큰 병원을 세웠습니다.

기근 때는 날마다 900명의 어린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습니다.

한 번은 가난한 병자들을 위해 외투에 물건을 가득 담아 가는데 남편과 마주쳤습니다.

남편은 집요하게 무엇을 가져가는지 보여달라고 가는 길을 막아섰습니다.

엘리사벳의 외투를 펴자 한겨울인데도 싱싱하고 향기로운 장미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남편은 아내가 자선을 계속하도록 허락한 것은 물론입니다.

 

 

루이가 멀리 떠나있을 때는 엘리사벳이 섭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만 있으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특히 나병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한 번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어린 나병환자를 데려다가 아들처럼 자기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루이가 갑자기 돌아왔고 분노한 미망인은 아들에게

엘리사벳이 무슨 짓을 해서 아들 얼굴을 더럽히고 있는지 보라며 며느리를 비난했습니다.

루이도 흥분해서 침실로 뛰어가 이불을 잡아챘으나 그 순간 그는 너무 놀랐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거기 누워 계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루이는 자기 부인에게 이런 손님은 항상 모셔도 좋다고 했습니다.

 

 

이런 엘리사벳이 혹독한 시련을 당해야했습니다.

1227년 프레데릭 2세 황제가 성지에 십자군을 보내기로 하여 열심한 루이 백작도 이 원정팀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루이 백작은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지나다가 사망하고,

무엇보다도 이 소식이 투린지아에 알려졌을 때 루이의 형제들은 엘리사벳을 학대하고

아이들과 두 명의 하녀와 함께 궁에서 쫓아냈습니다.

아인세낙 사람들은 새 주인들의 적의를 살까봐 그녀가 쉴 집도 주지 않았습니다.

한겨울 깊은 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군주의 딸이요, 지금은 미망인이 된 왕후는 겨우 두 달밖에 안된 막내아들과 세 아이들 그리고

두 시녀를 데리고 거리로 쫓겨난 것입니다.

 

다행히 어떤 남자가 마굿간을 은신처로 내주었습니다.

이 호의가 너무도 고마웠고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베들레헴의 이 집 저 집에서 거절당하다가 마굿간을 피난처로 얻게된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궁에서 일찍이 맛보지 못한 큰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전에 그녀가 헌금해서 지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밤중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달려가 수도자들에게 사은 찬미가를 노래해 주도록 청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이 예수님처럼 된 것을 감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생계를 위해 두 명의 충실한 시녀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려 아마를 잦았고 충분한 수입이 아닌데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 일부를 떼어 놓았습니다.

 

나중에 엘리사벳은 바르트부르그에서 복위되었습니다.

그때 프레데릭 2세 황제가 왕비를 잃고 엘리사벳에게 구혼했으나 거절했습니다.

가난과 은둔생활을 좋아했기에 비록 인간 대사라고는 하지만 세속적인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두 시녀들은 마르부르그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성당 근처의 작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프란치스코 3회에 가입했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독일의 최초 회원이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직접 서신을 받았습니다.

제복을 입고 띠를 두르고 병자들을 돌보았으며

학식과 신심을 갖춘 콘라드 수도자의 지도를 받아 전 생애를 봉헌함으로써 수도자처럼 살았습니다.

 

 

엘리사벳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난 적은 없으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엘리사벳 성녀에게 선물로 보내신 망토를

죽을때 까지 소중히 간직하셨다고 합니다.

 

 

주님이 그녀에게 죽음이 가까웠음을 미리 알려주셨기에

엘리사벳은 중병에 걸려있는 자기 고해신부는 곧 병이 낫겠지만

건강한 자신은 머지 않아 죽게된다고 예언했습니다.

정말 고해신부는 곧 회복되었고 엘리사벳은 나흘 후에 병이 들어 그 고해신부를 모시고 임종을 준비했습니다.

 

엘리사벳은 1231년 11월 9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녀의 나이 겨우 24세이었습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5년 그녀를 시성하였습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 3회 자매들의 특별한 수호자일 뿐 아니라 정규 3회의 수호자입니다.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그녀를 모든 자매들의 자선사업기관의 수호자로 선언하셨습니다.

(재속프란치스코회홈에서)


 

 

성녀 엘리사벳의 영적 지도 신부였던 마르부르크의 콘라트가 쓴 편지에서

 

엘리사벳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했다

엘리사벳은 그때부터 덕행에 있어 특출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항상 가난한 이들을 위로해 왔지만,

자기 궁 옆에다 병원을 짓게 하여 거기에서 온갖 종류의 환자들을 수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어려운 이들을 돌보아 주는 데 온전히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 병원에 도움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남편의 관할 지역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도 혜택의 선물을 너그러이 나누어 주곤 했다.

그래서 자기 남편이 관할하는 4개의 영토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재원을 모조리 나누어 주고

심지어는 자기 귀중품과 값비싼 옷들마서 팔아 거기서 얻은 돈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하루에 두 번씩 즉 아침과 저녁에 모든 환자들을 몸소 방문하는 관례를 가져

보기 흉한 환자들을 직접 간호해 주었고

어떤 이들은 먹이고 어떤 이들에게 침상을 마련해 주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업고 다니고 하여 자신의 자비심을 여러 형태로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생전에 남편의 뜻을 어긴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완덕에 더 가까이 이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와 자기가 문전 걸식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어느 성 금요일 날 제대보가 벗겨져 있을 때,

자기가 프란치스꼬회 회원들에게 기증했던 궁중 성당의 제단 위에 손을 얹고는

친한 벗들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 세상의 모든 허영 및

구세주께서 복음에서 버리라 권고하신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이렇게 한 후, 남편과 함께 살 때 모든 이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던 그 곳에서 계속 머문다면

세상의 소란과 세속의 영광이 자기 마음을 끌어 잡아당길 그런 위험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가 그것을 원치 않았는데도 나를 따라 마르부르크로 가기로 했다.

거기다 병원을 세워 많은 환자들과 불구자들을 모으고는

가장 버림받은 비참한 이들에게 식탁에서 시중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단지 그녀의 외부로 드러난 활동에 불과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녀에 대해 이 말을 하고 싶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나 그 눈에서 태양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나는 그의 고해를 들었다.

남기고 가는 재산과 의류를 가지고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내가 물어보자,

자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모두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기가 그때 입고 있던 낡은 옷을 제외하고는 (그 옷을 입고 묻히기를 원했다.)

전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을 마치고 주님의 몸을 영했다.

그리고나서 저녁 기도 때까지 자기가 전에 설교 말씀에서 들은 거룩한 이야기를 되새겼다.

마침내 열렬한 신심으로 주위에 모인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서 평온히 잠들 듯 숨을 거두었다.

(가톨릭홈의 세계의 성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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