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기도를 바치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침묵하신다. 이럴 때 많은 경우
믿음이 흔들리게 되며, '하느님이 계신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고통을 많이 받은 예언자이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에
어떻게 답하셨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고통 중에 있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를 깨닫도록 하자.
출처- 산북성당 최덕기 주교님이 올리신 글입니다.
--------------------- ------------------------- ------------------------------ -----------------
예레미야에게
침묵하시는 하느님
이번 달은 좀 다른 식으로 구약성경의 기도에 접근하고 싶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록들과 관련해서, 예레미야의 기도들보다도 하느님께서 탄원하는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응답들을 보고 싶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록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 불리는 본문들은,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겪게 되었던 고통을 하느님께 토로하는 본문들입니다. 보통 다섯 편의 기도가 고백록이라고 일컬어집니다(예레 11,18-12,6; 15,10-21; 17,12-18; 18,18-23;20,7-18).
예레미야서 1장에는 예레미야가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전해지는데, 이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선포해야 하는 말씀의 내용은 북쪽에서 오는 재앙, 곧 바빌론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의 멸망을 지켜본 예언자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 멸망을 예고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멸망을 선포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듣기 싫어하지요.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사제들과 거짓 예언자들은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리라고 헛된 약속을 하고, 어리석은 백성은 그런 말들을 더 즐겨 듣습니다. 임금도 마찬가지입니다(특히 여호야킴, 예레 36장 참조). 듣고 싶은 말만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포하신 멸망이 금방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조롱합니다. 그가 오히려 거짓 예언
자처럼 여겨집니다.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계시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예레미야에게도 점점 더 믿기 어려운 것이 되어갑니다. 하느님이 나를 속이신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예언자가 마치 하느님의 원수가 된 듯 그분께 격심한 저항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고백록들입니다. 고백록들은 아마도 유다 임금 여호야킴 시대에 작성되었다고 보며, 예언자가 전한 심판 선고를 이스라엘 백성이 거부하고 예언자를 박해한 다음에 이어서 나옵니다.
하느님의 응답
처음의 두 고백록에서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응답하십니다. 먼저 예레 11,18—12,6에서는, 전반부에서 예레미야가 원수들에게 복수해 주실 것을 청했을 때 하느님은 그들을 벌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1,18-23).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했던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응답을 듣고서 예레미야는 또 탄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만 하시고 가만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실현이 지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공정성을 문제 삼습니다. 이때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답이,“ 네가 사람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쳤다면 어찌 말들과 겨루겠느냐?”(12,5)입니다. 지금 네가 탄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보다 더 힘겨운 일을 겪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힘들어서 탄원할 때 이런 응답을 듣고 싶으신가요? 분명 아닐 것
입니다. 하느님은 탄원하는 예레미야에게, 더 굳세어지기를 요구하십니다.
두 번째 고백록에서도 양상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저주와 박해를 받으며 탄원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은,“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15,19)고 말씀하십니다. 탄원 같은 것은 그만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이미 예언자 자격을 상실했으니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예언자가 될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답은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예레미야에게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보호를 약속하시지만, 분명 그에게 감당하기 힘든 요구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나마 응답을 하시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세 번째 고백록부터 하느님은 아예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침묵
이것이 주로 다루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고백록에서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욥에게도 하느님은 그의 질문들에 직접 대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고통 받는 인간이 혼자 외치게 내던져두시는 것일까요?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진노하시며“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 42,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계속 부르짖었던 욥이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마찬가지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질문들에 즉각적인 답변을 주시거나 그의 원수들을 모두 물리쳐주지도 않으시고, 당신께서 그의 편이심을 모든 이들 앞에 증명해 주지도 않으시지만, 계속해서 탄원하는 예레미야를 꾸짖지도 않으십니다. 어쩌면, 그의 탄원을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이겠지요.
다른 질문을 던져봅니다. 처음부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주리라.”(예레 1,8)고 되풀이하여 약속하셨던 하느님은 과연 그 약속을 지키시고 예레미야를 보호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입을 다물고 침묵하시면서 그를 홀로 역경 속에 내던져두신 것일까요?
저는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시고 예레미야를 보호하셨다고 생
각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요새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벽으로” 만드셨다고 봅니다(예레 1,18; 15,20 참조). 그렇지 않았더라면 예레미야는 예언자이기를 계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거부와 박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예언자직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는 예언자 소명을 저버리지 않았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지탱해 주셨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에게 고통이 없었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는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에 그는 탄원을 부르짖으면서도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부르짖음을 말없이 들으시는 하느님
그렇다면, 계속되는 예언자의 부르짖음과 하느님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앞의 두 고백록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믿음과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위에 인용한 예레 12,5-6; 15,19 참조). 굳세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께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언자로 남아있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레미야는 탄식을 계속하면서도 동시에 예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저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의 부르짖음을 당신에 대한 믿음의 행위로 받아들이신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꾸짖을 때, 아이가 취해야 할 태도는 굳세게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보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자신이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있습니다.”(예레 15,17)라고 말씀드립니다.
그의 고통의 원인은 예언자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예언자의 사명이 그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때, 그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상처들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그 고통들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사명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하느님께 알려드리고, 시편저자의 말대로,“ 당신의 재앙을 제게서 거두소서. 당신 손이 내리치시니 저는 시들어갑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었습니다(시편 39,11).
이것은 피조물의 작음을 인정하는 것, 하느님의 손안에 내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님께, 내 힘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부르짖는 예언자에게 응답하지 않으시지만, 그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지 않으시고 당신 팔로 그를 안고 가십니다.
고통이 있을 때에는 탄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셔도, 탄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탄원은, 예레미야의 탄원처럼 불경하게 보일 때까지도,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내맡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 탄원을 당신을 향한 기도로 받아들이십니다.
- 안소근 수녀
출처: 경향잡지 9월호에서